♬ BGM : 레브(Reve) - 말 없는 소원 / 기억할게요,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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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을 선택해도 후회할 수 있다는

말은, 어느 길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한다.









하고 싶은 말을 뒤집어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이더라.

가기 싫은 길을 뒤집어보니

가야 할 길이더라.

소란한 꿈을 뒤집어보니

덧없는 욕심이더라.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뒤집어보니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더라.

너의 침묵을 뒤집어보니

이별이 선명하더라.









 작가라는 건 선생님이나 의사, 그런 것처럼 직업이잖아요.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게 꿈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무슨 이야긴지 모르시겠다고요? 음... 그러니까 꿈이란 건 소망이잖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 내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고마워하는 사람, 계산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게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작가든 요리사든 목수든 상관없어요. 꿈이란 일생 동안 품어야 하는 거고, 이루어가면서 또는 이루려고 애를 쓰면서 행복해져야 하는 거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동화를 쓰고 싶다거나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거나 그런 게 꿈이라고 믿었어요.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고, 다른 대답을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지금 제 꿈이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이 길어졌다.









가치관의 차이란 같은 것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다.

그 차이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일 또한 '떠나기 전'의

선상에 있는 것, 먼저 떠난 이들의

부재 안에서 나는 존재하고, 언젠가

누군가 나의 부재 안에서 또 무슨

생각에 잠기겠지.









영원한 착오 



 브론스키는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완전히 실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이 자신이 기대했던 행복의 산에서 겨우 한 알의 모래를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느꼈다. 행복이란 희망의 실현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하고 있는 영원한 착오였다.

_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절망으로 까무러치고 희망으로 까무러치고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유유히 흘러가는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살아가는 일, 행복과 불행의 극과 극을 오가던 브론스키가 마침내 안나를 독점하게 되었을 때,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모든 것을 바쳐 겨우 움켜쥔 것이 실은 모래알 하나라는 것이었다.

 알아, 알아, 그 기분. 하지만 모래알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도 없는 형편. 삶은 그렇게 잔혹한 희망으로 연명된다. 그리하여, '흔히 하고 있는 영원한 착오'는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고, 불행히도 내일, 또 내일까지 이어질 것이다. 모두들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싫다는 감정



 싫다는 감정은 좋다는 감정보다 강렬하다. 좋아하는 무엇이 같을 때보다 싫어하는 무엇이 같을 때, 이 사람은 나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우리 좀 오래갈 것 같다고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을 볼 수 없을 때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봐야만 할 때가 더 힘겹다. 좋은 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 하지만 시간의 두께에 쉽게 파묻힌다. 돌아보면 이미 아득한 곳에 먼지처럼 흩어져 있다.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칼날처럼 날카로워져서 싫은 기억으로 변하는 좋은 기억도 있다. 싫은 기억 여기 점점 잊히지만, 좋은 기억보다 끈질긴 면이 있다. 기억의 질감은 변함이 없어 여전히 싫고 영원히 싫다. 마찬가지로 슬픔은 기쁨보다 강하고 불행은 행복보다 깊다. 그러니 감히 행복을 소망하는 대신, 절망을 피해 살 일이다.









손가락의 기억



 봄에는 아무래도 슈베르트여서, 손때 묻은 악보를 다시 꺼낸다. 피아니시시모와 더블플랫이 여전히 아릿하고 아찔한데 눈은 악보를 따라가지 못한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이 기억을 떠올린다. 더 이상 사월은 행복하지 않으니 봄도 행복하지 않고, 오래된 선율에 담긴 슬픔의 질감과 무게도 달라졌다. 그래도 손가락이 슈베르트를 기억하고 있으니 대견한다. 현란한 마음이나 이기적인 뇌의 기억이 아니라, 바보처럼 충실한 육체의 기억이다.









모르는 게 나쁜 거야 



 _몰라서 그런 거겠지.

 누군가의 부주의한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은 친구가, 자조와 체념을 뒤섞어 한숨처럼 내뱉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쩌다 한 번이 아닌지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_모르는 게 나쁜 거야.

 발끈한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 모른다는 건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잖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도 없다는 거잖아. 상처 입고 아파하는 것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거잖아.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잖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라는 말들도 한다. 하지만 말이지, 그게 악의야. 말을 하기 전에, 행동을 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았다면, 무심코 뱉은 말이나 취한 행동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보았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지.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지금 건네려 하는 것이 돌인지 빵인지는 알아야 하잖아. 예를 들어 음주운전을 하다가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그걸 악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이 '악의' 그 자체잖아.

 '깜박 잊어버렸어'라는 건 사과니, 변명이니? 잊어버리는 게 나쁜 거야. 누군가와의 약속이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다면 애초에 약속은 왜 하니. 그래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가 아니지. 미안하다는 말은 뭔가 더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쓰는 아름다운 말이야. 함부로 쓰지 말라고.









어떤 이별은



좋은 이별은 없잖아요, 내가 말했다.

이별이 좋을 수는 있지, 그가 말했다.

오, 멋진 말이네요, 나 그거 써먹어도 돼요? 내가 말했다.

마음껏 써, 그가 말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만들어보았다.



좋은 이별은 없을지 몰라도, 어떤 이별은 좋을 수 있다.









이 세상의 속도는 나에게 너무나 빨라요.

새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헌것이 되어버리고

감정이나 마음도 숨이 가빠요.

세계가 정상이었떤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겠느냐마는

이렇게 통째로 미쳐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시간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는 것들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져가니

나는 자꾸 낡아가는 것 같아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스물다섯이 말했다.



_나도요, 나도요.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사람을 마중하는 두려움과 배웅하는 슬픔에 기대어,

집으로 돌아오는 헛헛한 행복에 잠겨,

보내는 것이어서.









그런 식이다 



 뭐든, 이를테면 수영이든 글쓰기든 요리든 피아노든, 어쩌면 연애까지도, 잘되지 않으면 지겨워진다. 순조로울 때도 있지만 정체될 때도 많다. 탁, 하고 가로막힌 벽이 어느 순간에 나타난다. 그럴 넘으려면 지겹고 힘든 걸  꾹 참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데, 지겹고 힘드니까 '열심히'가 잘 안 된다. 더욱 큰 문제는, 좌우지간 어찌저찌 공 들여서 벽을 넘었는데 또 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좋은 순간은 짧고 힘든 순간은 대체로 길다. 뭐든, 그런 식이다. 좋아하니까 시작했고 그래서 몇 번인가 벽을 넘었다 해도, 이번 벽을 넘을 수 없다면, 그만큼만 좋아했던 것다. 다시 말하지만, 연애도 그렇다.









 김욱동이 번역한 민음사의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김영하가 번역한 문학동네의 개츠비, 첫 문장은 이렇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 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김석희가 번역한 열림원의 개츠비는 이렇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어리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하나 해주셨는데, 그 충고를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피츠제럴드의 원문은 이렇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좋은 책은 여러 버전의 번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하루키의 말에 동감한다. 나라면, 아마 이렇게 번역했을 것이다.

 쉽게 상처받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언제나 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다.









되다 안 되다 하는 건



 "되다 안 되다 하는 건 된다는 거지요."

 수영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여러 번 되뇌고 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할 때, 그래서 안 되던 것을 되게 하려고 할 때보다, 어설프게 되다 말다 할 때가 더 힘들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뭐라도 할 수 잇을 것 같은데, 해보니 잘 안 되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에잇, 하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아마도 그런 시기에 많은 것을 포기해온 듯하다. 그런데 선생님의 저 말씀이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되다 안 되다 하는 게 되는 거라면,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다음부터는 노력만 하면 되니까. 될 때가 안 될 때보다 점점 많아질 게 분명하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영법이나 주법, 사람의 마음과 리듬을 맞추는 일, 상처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 먹먹했던 상실을 잊는 일이라 해도.









혼자 살기 위해서는


 

 같이 지내면 좋을 때는 아주 좋고 나쁠 때는 아주 나쁘다. 혼자 지내면 좋을 때는 그럭저럭 좋고 나쁠 때는 그럭저럭 나쁘다. 저울에 달아볼 수는 없는 문제지만.

 한때는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듯하다. 내가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겠지, 하다가, 혼자서 잘 지내는 사람이 반드시 혼자 살고, 누군가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반드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도 아닌 걸 보면, 태생적 요소에 다양한 환경적, 운명적 요소가 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혼자 살기 위해서는, 사흘 간 연락이 끊어졌을 때 수소문을 해 주는 사람이 최소한 셋 이상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나는 몇 명이다 되는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집에 틀어박혀 사흘째 혼자 지내고 있는 이 시간이, 썩 괜찮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누가 불러내지 않으면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확실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랜만에 만난 탓에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그의 근황을 한참이나 듣다가,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해'라고 내가 말했다고, 그러자 그가 깊은 한숨을 쉬며, 요즘 좀 힘이 들어, 대답했다고,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그날 우리의 대화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서 듣고는, 누가 어딜 들어갔는지 나왔는지 이사를 갔는지 결혼은 했는지 툭하면 잊어버려 무심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고 있는 나로서는, 뭔가 변명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응, 언제나 궁금한 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견뎌내고 있는지.









물질적 세계



 헤어짐을 예감해본 적은 없었다. 헤어지지 않을 거라 믿어서가 아니라 헤어짐은 필연적인 거라 믿었으므로, 필연과 예감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분명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으므로.

 피츠제럴드의 말대로 이 세계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물질적이다. 나는 물질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명사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마치 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리하여 나의 세계는 늘 지나치게 무겁거나 가벼웠고 우리는 늘 지나치게 가깝거나 멀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당신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고, 나는 당신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나를 들키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사물이 제자리에 있는 것, 물을 마시는 것, 손 닿는 곳에 책이 있는 것에서 위로를 구하려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청난 물질의 질량, 그 에너지로 구성된 물질의 세계 속에서.









행간을 읽고



예민하다는 것은 일종의 공감각이어서

다른 이들이 눈으로만 인지할 때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고

다른 이들이 귀로만 들을 때 색채를 함께 보는 것.



혹은 침묵을 듣고,

행간을 읽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것들을 미리 짐작하는 것.









 "사랑하는 루('사랑하는'이라는 말에 밑줄을 세 개나 그었다). 우리가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지금 저의 큰 소망입니다." 릴케는 가장자리에 '나의 영원한 지주, 나의 전부'라고 휘갈겨 쓴다. (중략)

 루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대'에게 답장을 쓴다. (중략)

 "나는 그대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_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중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 효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내 친구 제롬 브루너는 언젠가 자기가 좋아하는 모차르트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아주 즐겁게 들은 뒤 음반을 뒤집으려고 가보니, 음반을 아예 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친숙한 음악일 때 종종 경험하게 되는 사례 가운데 극단저긴 경우에 속한다. 라디오를 끄거나 곡이 끝났을 때도 음아깅 희미하게 들린다고 상상하면 마치 음악이 조용히 계속 연주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연구자들이 '화이트 크리스마스 효과'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해 1960년대에 몇몇 실험이 행해졌다. 이는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했던 빙 크로스비의 노래를 거의 0에 가까운 볼륨으로 줄이거나, 실험자가 노래를 튼다고 말해놓고 실제로는 듣지 않았는데도, 일부 피험자들이 노래를 '듣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_ 올리버 색스 『뮤지코필리아』 중에서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내 앞에 없어도,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저런 얼굴을 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은 저렇게 반응한다. 나는 당신을 웃게 할 수도 있고, 아프게 할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을 구할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소유할 수도 있고, 매정하게 떠날 수도 있다. 만남과 이별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재생하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터무니업싱 긴 세월이 놓여 있어도, 이 상태를 '이별'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음악이 없어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이 없어도 당신을 소유할 수 있다. 그때 그토록 익숙했던 당신을 내가 잊지 않고 있다면.









한 사람을 잊겠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생의 은유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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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꽃가화 2017.12.10 19:21

    글도 좋지만 레브님의 곡이 너무 좋네요..ㅎㅎ♡

    • BlogIcon 브금술사 YOHAN 2017.12.16 11:24 신고

      그쵸? ㅎㅎ 제가 제일 좋아하는 뉴에이지 작곡가랍니다 ♥
      이번 곡들은 네이버 블로그 할 때 올렸었던 곡들인데
      티스토리에서는 안 올렸던 곡들이에요.
      이번 포스팅은 글만 읽기에는 귀가 심심할 것 같아서
      한번 골라봤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좋네요 :D

  2. BlogIcon 레브(Reve) 2017.12.26 13:25

    트빌트님 늘 감사합니다 ^^